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이로 회담 (문단 편집) === 미소 사전 교섭 === 한편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제의를 하기에 앞서 스탈린에게도 제의를 보냈다. 루스벨트가 구상한 것은 중국과의 단독 교섭이 아닌 미중영소를 아우르는 4대 강국 회담이었기 때문이었으며 독일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축을 담당하는 스탈린과도 회담하여 전쟁의 진행 방향에 대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한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1942년 12월 루스벨트는 그와 처칠과 북아프리카에서 함께 만나고 싶다고 처음으로 제안했으나 스탈린은 12월 6일 전쟁 지휘를 위해 소련을 떠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1943년 5월 5일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회담을 또다시 제의했지만 스탈린은 회담의 필요성에 공감하면서도 전쟁 지휘를 구실로 거절했다. 퀘벡 회담이 끝난 후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다시 스탈린에게 3자 회담이 필요하단 전보를 보냈으나 스탈린은 회담의 중요성에 찬성하나 국가를 떠날 순 없다고 다시 답장했다. 1943년 9월 4일 루스벨트는 11월 15일부터 12월 15일 사이에서 북아프리카에서 처칠과 함께 회담하자고 제의했고 스탈린은 9월 8일 회담시기는 동의하지만 이란에서 회의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역제안했다. 9월 9일 루스벨트는 회담 시기는 11월 말로, 장소는 테헤란보다 가까운 이집트를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자신에게 안전한 테헤란을 고집했다. 이에 관해 루스벨트는 쑹쯔원을 통해 장제스에게 3가지 사항을 질의했다. ||<(> 1. 이 기회에 중국은 소련과 회담할 용의가 없는가? 1. 소련이 만일 대일작전에 참가하면 중국은 그와 합작할 수 있는가? 1. 미국의 태평양정책과 '징검다리 전술'에 대해 중국은 찬성하는가? || 장제스는 1번은 시기미숙이며 2번은 군사상 합작할 용의가 있고 3번은 찬성한다고 대답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중소 회담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스탈린이 테헤란을 고집하고 장제스가 스탈린과의 회담을 거듭 거부하면서 결국 스탈린, 장제스가 함께 모이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10월 14일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헌법상 대통령이 상시연락이 되지 않는 장소에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면서 카이로에서 회담하자고 제안했다. 10월 19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 외상 회담이 열렸는데 미국은 쿠릴 열도의 소련 할양을 제안하며 소련의 대일 참전을 요구했으나 몰로토프는 회답을 유보했고 10월 30일에 이르러서야 대일 참전을 헐 국무장관에게 전했다. 한편 스탈린은 회담 장소에 대해서는 10월 19일 테헤란 외에는 안된다고 못을 박았다. 10월 25일 루스벨트는 처칠에게 전보를 보내 스탈린의 고집에 대해 불만을 드러내면서 "만일 [[이오시프 스탈린|그]]가 (테헤란을) 고집한다면, [[윈스턴 처칠|귀하]]와 [[프랭클린 루스벨트|본인]]은 북아프리카 혹은 피라미드에서 소수의 막료를 동반해 회합을 하고 우리들의 회담이 끝날 무렵 3일간 장제스 위원장과 회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결국 스탈린을 카이로 회담에 데려오는 것을 포기하고 3국 정상회담으로 양분했다. 스탈린과는 별개의 회담인 [[테헤란 회담]]에서 만나는 것이 확정되었고 루스벨트는 11월 8일 스탈린에게 11월 26일이나 27일 테헤란에 가서 처칠과 회담하기로 결정했다고 전보를 보냈고 스탈린은 11월 10일에 이를 수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